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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지방유형문화재 제38호‘척주동해비'의 유래  
도예가 김용균“옛 것을 찾아 영혼을 불사르다”
서울구정신문(http://seoulgujung.co.kr)   
기사관리자 | 2015.01.19 12:01 |
» 척주동해비각


미수 허목과 척주동해비의 유래

지방유형문화재 제38호인 척주동해비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다음과 같은 역사의 진실이 담겨져 있다.

서기 1660년 조선 현종 원년 10월에 미수 허목선생이 삼척부사로 부임한다.

그가 재임 시 동해에는 조석간만(潮汐干滿)으로 인한 해파(海波)가 격심하여 조수(潮水)

육지의 부락까지 치밀어, 여름 홍수 철에는 강구가 막히고 오십천(五十川)이 범람하였다.

이와 함께 백성들의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부사 허목은 이를 안타까이 여겨 1662, 바다의 풍랑을 막기 위해 당나라의 문호인

한유가 악어를 금축(禁逐)한 고예(故例)를 생각하며 사운사시(四韻四時)의 신비로운 문장인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웅휘(雄揮)한 필치(筆致)의 전서비문(篆書碑文)을 써서 세웠다.

자연도 이 신비로운 문장의 위력과 덕화에 감동하였음인가. 그 후 이곳에서는 조수가 잠잠해 졌다.

동해비(東海碑)는 이때부터 조수를 물리치는 위력을 지닌 비석이라 하여 일명 퇴조비(退朝碑))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비석은 처음 정라동(汀羅洞) 만리도(萬里島)(지금의 축항 끝 지점)에 세워졌는데, 서기 1710(肅宗.숙종36)2월에 부사 박내정(朴乃貞)은 이 비를 죽관도(竹串島), 지금의 육향산(六香山)(동해 바닷가의 삼척항이 내려다보인다)으로 옮겨 비각(碑閣)을 지어 안치했다.

현재의 위치인 육향산정(六香山頂)에 이전한 것은 지난 196912월 이었으며, 2년 후인 1971년에 지방유형문화재(地方有形文化財)3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용암
(龍巖)의 도예 대본에 다시 태어난 동해비문

도예가 용암 김용균은 도예 외길에서 척주동해비문을 그의 작품에 상감(象嵌)할 때처럼

긴장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김용균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가마 문을 열었을 때 자적(紫赤)이 현황(炫惶)한 불꽃은

이윽고 자지러들고 숨 쉬는 듯 모습을 드러낸 작품 대본은 한 순간 온몸을 떨게 하는 그것이었다고 술회한다.

용암은 이 대본 명도(名陶)를 만들기 위해 전남 당진의 점토(粘土)와 하동의 백토, 그리고

김천의 규석(硅石), 지리산 약토(藥土)를 손수 채집하고 정성을 다해 수비(水飛)했다.

흙물을 저어 이물을 걸러내고 흙속의 공기를 뺀 다음,물레에 올려 성형하고 깍 음 질 할 때까지만 해도 그것은 장인(匠人)의 일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수의 고전(古篆), 설흔 자서(字序)192사운사시(四韻四時)의 그 고기(古奇)로운

문자를 음각(陰刻)으로 파내고 적토(赤土)를 넣어 상감하는 작업에서 용암은 수 십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신비한 문의(文意)의 위엄에 감히 칼끝이 범접할 수 없었다. 그 과정이 차라리 외경과 공포에

가까웠다.”고 토로한다.

천추(千秋) 327. 선대의 비법을 전수한 용암의 명도에서 다시 태어난 陟州東海碑文은 대본의 알몸으로 900도의 초벌구이를 또 거친다.

다시 골분(骨粉)과 떡갈나뭇잎을 태운 재, 소나무를 태운 재와 약간의 광물질 장석(長石)과 규석을 혼합한 유약(釉藥)을 배합하여 체로 걸 른 다음 대본은 분장과정에 들어간다.

이제 길고 긴 스무 시간, 1300도의 고열을 이겨내는 인고(忍苦)의 시간이다.

그리고 뜨거워진 몸을 천천히 식혀야한다. 다시 스무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것이다.

불멸(不滅)의 동해송(東海頌)이여 용암(龍巖)의 명도(名陶) 대본이여.

그때 용암은 자신이 가마 속에 함께 들어가 재가 되어 버린 듯한 환각에 빠졌다.

아득히 먼 곳에서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기획특집국 양영문, 최성철기자 jkh4141@hanmail.net>

  미수 허목(許穆)선생은 선조 28(1595)에 태어나 정인웅에게서 처음 글을 배웠고, 거창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 정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글을 배웠다. 그림과 글씨, 문장에 능했으며, 특히 전서(篆書)에 뛰어나 동방의 일인자라고 불렸다.

갓 태어났을 때 손바닥에 손금이 있고 발바닥에는 금이 나있었으며 눈썹이 유난히 길어 그의 호 미수의 출처가 여기서 생겼다고 한다.

용암 김용균은?

1989년 도예입문

1998년 아비수 설립

1998년 동해비 도자기개발(청자 분청 백자)

동해비 상감기법 개발

1999년 아비수도예연구소 설립

유형문화재 38호 도자기사용

199912월 삼척시청 동해비 응모, 계약(상표계약)

2001년 토찬비 개발 음각, 양각

20024월 국제미술교류전 예술의 전당(협찬사)

2003LG(GS)홈쇼핑 영부토찬비 방영

1990-2015년 개발상품 동해비 토찬비 영부 12각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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